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 점령하 일본 (문단 편집) == 설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HQ_building_circa_1950.jpg|width=100%]]}}} || || '''{{{-1 {{{#fff [[1950년|{{{#fff 1950년}}}]],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본부 건물로 징발되어 사용되었던[br][[도쿄도|{{{#fff 도쿄도}}}]] [[치요다구|{{{#fff 치요다구}}}]]의 '다이이치 생명관'}}}}}}'''[* 본래 1933년 농림중앙금고 사옥으로 건축되었고 1938년에는 다이이치(第一) 생명보험 회사가 입주하였다. 지금도 농림중앙금고(農林中央金庫)와 다이이치 생명보험의 공동 소유이다. 오늘날까지도 증축을 거치면서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는 건물인데, 지금은 'DN Tower 21'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다이이치 생명관 앞의 강처럼 보이는 것은 [[고쿄]]의 [[해자]]다. 일본 정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천황]]의 거처인 고쿄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DN_Tower_21.jpg|width=100%]]}}} || || '''{{{-1 {{{#fff 2008년, 'DN Tower 21.}}}[br]{{{#fff 기존 건물 뒤에 신축 고층 빌딩을 이어 붙여 증축했다.}}}}}}'''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전쟁을 버텨낼 수 없었던 [[일본 제국]]의 [[일본의 항복|무조건 항복]]으로 [[미국]]은 [[몰락 작전]]을 취소하고 일본 점령과 통치를 위한 [[미군]]의 신속한 전개를 목적으로 블랙리스트 작전[* 이 작전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1945년 6월에 미군 합동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했다는 가정 하에 일본과 남한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담긴 내용이었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약간 변형이 되어 시행되었다. 이때 남한에 배치된 미 육군 제24군단의 전개에 대한 작전은 "베이커-포티"(블랙리스트 포티)라는 코드네임이었다.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후 동아시아 지역에, 정확히는 아직 소련군이 도달하지 않은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던 미국의 정책으로 일본 본토 뿐만이 아니라 남한과 중국 북부에도 미군이 배치되었다.]을 발동했다. 그 후 아시아-태평양 전선의 최전선 곳곳에 있던 [[미합중국 육군|미 육군]]과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의 사단들은 신속하고 재빠르게 일본 본토로 공수 및 상륙한다. [[오키나와섬]]에 머물던 미 육군 제11공수사단[* 종전 후 1949년 5월까지 혼슈 북부와 홋카이도에 주둔했으나 남한 미 군정 종료로 한국에서 철수해온 제7보병사단과 교체되어 미국 본토로 철수한 후 훈련부대로 재편되었다.]이 수백대의 수송기에 분승하여 가장 먼저 일본 경내의 아츠기 비행장으로 공수되었고, 이후 제1기병사단이 전개되어 [[도쿄]]에 배치되었다. 그 뒤로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의 제6사단의 제4해병연대가 [[요코스카]]의 [[일본 해군]] 기지에 상륙하여 기지 주변을 접수하고 제5상륙군단[* 미 해병대의 제2,5 해병사단.]은 [[규슈]]에 상륙하여 점령군으로 배치된다.[* 제3상륙군단(1,6해병사단)은 중국 북부([[베이징]]과 [[톈진]], [[산둥성]])에 상륙하여 47년까지 점령군으로 지내고 미국 본토로 귀국했다.] 그 뒤로 1945년 연말까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 사단 16개 이상[* 일본에 배치된 미 육군의 주요부대는 제1기병사단, 제11공수사단, 아메리칼사단, 제24, 제25, 제27, 제32, 제33, 제41, 제43, 제77, 제81, 제97, 제98보병사단, 제112기병연대, 제158보병연대] 미군 총 500,000명 이상이 후속 부대로 상륙하여 [[일본]] 곳곳에 배치되어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찰]]/[[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집행하고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영국군]]을 비롯하여 [[호주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등으로 구성된 [[영연방]] 군대들도 시코쿠와 주고쿠 지역을 점령군으로서 통치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중국 국민혁명군]]의 경우 주부 지방을 군정 지역으로 배정받아 제67사단을 보냈으나, 선견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공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파병이 중지되었다. 한때 최대 4만 명까지 달했던 영연방군은 한국 전쟁에 배치되는 등의 이유로 1951년까지 일본 본토에서 모두 철수하고 미군만 남았다. 미군도 전후 군축으로 1946년 여름까지 많은 부대들이 순차적으로 미국으로 복귀함에 따라 [[6.25 전쟁]] 발발 시점에 [[주일미군]]의 규모는 약 8만 5천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정부]]를 통해 간접 통치를 실행했고 [[쇼와 덴노]]를 처벌하지 않았기에 부담을 덜고 주둔군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시점에서 미군 4개 사단(제1기병, 제7/24/25보병)이 여전히 주둔했으나, 이들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함에 따라 이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예비대(훗날 [[자위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